[오피니언] 사이트앤페이지 박성진 대표 - 기억은 도시재생의 우물

2021.04.21 1019

기억은 도시재생의 우물



박성진 (사이트앤페이지 대표, 『모든 장소의 기억』 저자)




나는 공간기획자다. 건축물을 설계하거나 디자인하기 이전에 그 공간이 가져야 할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고민하고, 그곳에 세워질 건물의 바람직한 가치와 콘셉트, 철학 등을 찾는 일을 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어디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고 영감을 받으세요?” 나는 아이디어 가득한 비밀의 보따리나 처음부터 창의적인 발상 따위는 없다. 그저 한 장소가 갖고 있는 사소한 기억과 기록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끈질기게 발굴해 현재와 연결시키려 노력할 뿐이다. 




장소는 기억의 실체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유사점을 확인하고, 기억을 통해 과거가 다시 한번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한다. 기억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 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하고, 과거를 임계거리에 두고 재구성한다. 역사는 현재와의 연계성을 설명할 때 감정의 개입을 피한다.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변하고 쉽게 파악하기 어려우며, 역사의 데이터는 지속적이고 입증 가능하다”

- 패트릭 H 허튼 『History as an art of memory』, 1993


기억은 기록과는 달리 불완전하고, 주관적이며 또 형식이 없다. 우리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하더라도 인간의 뇌 용량과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또 특별한 외적 자극 없이는 기억이 드러나거나 출력되지 않는다. 이런 기억 가운데 집단적 공적 차원의 것은 기록으로 남겨지지만 거기에 편입되지 못한 기억들은 우리 도시와 마을 곳곳을 떠돈다. 



전농2동의 기억을 모은 끌림골목 매거진  (사진·김영문)

 

    


그래서 나는 우리 주변의 장소와 공간이 기억의 실체라고 믿는다. 우리가 도시재생을 통해 건물과 길을 보전하려는 이유도 그것 자체가 아름답거나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어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사소하지만 오래된 우리의 기억이 그곳에 있기에 오늘날 그 장소에 대한 애착 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어떻게든 이어가려 하는 것 아닐까? 서울시 미래유산만 하더라도 도시관리분과도 아닌 정치역사분과와 시민생활분과의 미래유산 또한 대부분 장소이거나 공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결국 장소가 기억을 웅변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재생사업은 건물과 길 같은 하드웨어의 보존과 개선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 건물이 기억을 담는 그릇이니 건물이 보존하면 기억도 남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기억은 기록이나 역사와 달리 모호하고, 불완전한 감성과 주관에 의존한다. 그러니 역으로 이를 계속 발굴하고 붙잡으려는 새로운 시도와 노력이 없다면 점점 희미해 사라지고 만다. 한때 도시재생의 대표 사례였던 돈의문 박물관마을에 많은 구옥과 길이 보존되었지만 도시재생의 성공사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곳의 길에서 우리의 기억이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오락실과 사진관, 1970~80년대 영화포스터, 플라스틱 연탄재 등이 거리를 꾸미지만 이는 이 장소의 고유한 기억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기억들을 대체하는 7080의 기성품들이다. 


그래서 반대로 이야기하면 도시재생사업은 우리가 기억할만한 가치와 문화가 없는 곳에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다. 단지 건물이 낡고 길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면 도시재생이 아니라 그냥 환경정비사업이 맞다. 도시재생사업과 환경정비 사업이 구분되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기억의 회복과 재생


기억은 관념적이고 모호해 그동안에는 학문적 대상이 아니었고, 그저 뜬구름 잡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 중심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사회가 감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진입하면서 기억도 학문의 대상으로 점점 다뤄지고 있으며, 현실에서도 대중에게 효용성을 갖게 되었다. 


도시재생에서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재생사업의 창조적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패트릭이 말한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 거리를 두는 반면 기억은 불안정하더라도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고 현재와 교감한다. 기억은 기록이 되고, 또 역사로 남기도 하지만 도시재생에서 중요한 스토리나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스토리텔링은 현재성을 갖고 사람들의 기억에 상호침투하여 창발적 성과를 보일 수가 있다. 


건축물의 보존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척도가 중요한 것처럼 도시재생에서도 어떤 기억을 남기고 현재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도시재생으로 지역의 기억과 이야기를 내포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지역의 문화적 존속과 지역 구성원 간의 동질감, 소속감을 갖게 해 주어 주민들에게 지역사회 공동체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할 수 있다. 





개포동 그곳 (@gaepothere)




개포주공아파트 재개발을 앞두고 이성민 감독이 그곳 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 모았던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는 재개발 예정지에서 진행되었지만 기억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도시재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배달의 민족이 을지로의 제조업체를 돌며, 업체 사장님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기억하던 간판 글씨의 모습을 ‘을지로체’로 복원한 것도 도시재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개포동 그곳 (@gaepothere)




기억은 스토리가 되고, 그 스토리는 다양한 콘텐츠의 형태로 장소의 원형적 가치를 우리에게 전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기억을 다루는 제도권의 방식은 재생사업 전후의 형식적인 기록화 작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의 지속과 회복이라는 도시재생의 궁극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개선과 기억의 발굴이 동시에 진행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 지역이 갖고 있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무엇이고, 여기서 계승해갈 것이 무엇인지 논의한 후 이런 방향에 맞춰 도시공간의 구조를 어떻게 보존하고 바꿔갈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초현실부동산


지난해 여름 생각이 맞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인 ‘초현실부동산’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되고 낡은 건물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편도 마다하고 그 공간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결국은 그 공간의 고유한 기억과 이야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단순히 건물만이 아니라 장소의 기억과 이야기를 발굴해 건물과 함께 새로운 사용자들에게 중개하려고 노력 중이다. 초현실부동산은 오래된 건축물과 함께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영감, 그리고 내일의 꿈을 중개하는 곳’을 지향하고 있다. 



초현실부동산이 중개 중인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 점포주택


초현실부동산이 중개 중인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 점포주택 (사진·전명희)


초현실부동산이 중개 중인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 점포주택 1920년 엽서 속 모습



최근에 중개를 시작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점포 주택의 경우 1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아주 흐릿한 기억들이 남아 있다. 100년 전 강화 인삼을 중국에 수출하던 화교 교역상의 점포주택이었다는 구술채록부터 그때 제물포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까지 모두 이 공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기억과 기록이다. 도시재생에서 기억이라는 요소는 그저 꿈과 낭만적인 소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내겐 마르지 않은 깊은 우물과 같은 존재다. 그 우물에서 무엇을 길어 올릴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박성진 PROFILE
박성진은 사이트앤페이지의 대표로, 건축과 공간을 기획하고, 이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건축이론역사를, 스페인 마드리드공과대학에서 ‘건축문화유산의 복원과 경영’을 공부했다. 지금은 이를 밑천 삼아 공간기획, 도시재생사업기획, 디자인컨설팅, 출판, 전시 등의 활동을 전방위로 이어가고 있다. 현재 초현실부동산(www.surrealestate.kr) 공동운영자,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도시관리분과 위원장 등을 겸하고 있으며, 앞서 월간 「SPACE(공간)」의 편집장, 서울디자인컨설턴트, 공공디자인으로 행복한 공간 만들기 총감독을 역임했다. 지난 4월 개인 산문집 『모든 장소의 기억』(문학동네, 2021)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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