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으로 변모한 낙원상가 투어

2020.08.28 2382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낙원상가 투어

여기가, 우리의 낙원




국내 최초 주상복합빌딩에 자리한 세계 최대 악기 상가. 영광의 이름이었던 낙원상가는 한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세월과 규모만큼 다채롭게 섞인 기억을 이정표 삼아 이 친숙하고도 새로운 낙원을 걸어 보았다.

 





5층 옥상에서 종로의 중심을 확인하다


낙원상가 5층 옥상에 서면 이곳이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이 실감 난다. 창덕궁을 향해 쭉 뻗은 삼일대로를 기준으로 서쪽에는 인사동, 동쪽에는 익선동과 종로3가 일대, 남쪽 방면으로는 파고다 공원이 있다. 저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지역들이다.

낙원상가의 이런 지리적 특색은 유서가 깊다. 조선시대부터 낙원동 일대는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창덕궁 앞 서민들이 오갔던 피맛길 덕분이다. 당시 주막과 기방에서 번성했던 유흥문화는 해방 후 사교클럽과 살롱 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으로 변모하며 오랫동안 ‘서울 밤문화 일번지’로 군림했다.


 


5층 옥상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




익선동으로 연결되는 낙원상가 서쪽 낙원동 일대




낙원동과 악기의 본격적인 인연은 구한말 파고다공원에 대한제국 최초 서양음악단인 ‘황실군악대’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황실군악대는 해방 후 ‘경성악단’으로 정비하며 시민을 위한 정기연주회 등을 열었고, 악단의 악사들은 이 일대에서 악기를 팔거나 음악 교습을 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그렇게 차례차례 파고다공원 아케이드에 들어섰던 악기 상점들은 서울시가 1979년 탑골공원 담장 정비사업을 시행하면서 낙원상가로 이주하게 됐다. 유흥이 필요한 대중, 이를 뒷받침할 악기, 그리고 음악인이 자연히 낙원동으로 몰리게 됐다.




여기가 바로 세계 최대 악기 상가


5층 옥상에서 내려와 온갖 악기가 모여 있는 낙원상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2층은 다양한 매장이 들어선 종합상가, 3층은 대규모 매장으로 구성된 전문상가다. 이곳에서는 기타, 색소폰, 피아노 같은 대표적인 현악기, 관악기, 건반악기, 타악기는 물론, 마이크와 앰프 등의 음향기기, 각종 악기의 세부 부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9천여 평 공간에 모인 1천~1천2백여 명의 상인들은 약 3백 개의 악기 관련 매장에서 총 3만여 종의 악기 관련 물품을 국내외 구매자와 거래하고 있다. 이만한 규모의 악기전문상가는 전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1992년부터 음향기기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유강호 유일뮤직 대표는 1980년대 후반의 낙원상가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밴드와 나이트클럽 문화가 폭발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악기 상점이 지금보다 3배는 많았을 거에요.” 그때 낙원상가는 음악인을 위한 일종의 ‘인력시장’이기도 했다고 그가 덧붙였다. “기타리스트, 키보디스트, 드러머, 보컬 등 밴드음악을 하는 이들은 아침부터 죄다 여기로 향했어요. 무대에 오를 연주인이나 새로운 밴드 멤버를 찾기도 하는 곳이었지요.” 




 

2층 종합악기 매장




낙원상가 도시재생협동조합 이사장인 유강호 유일뮤직 대표



전성기를 누리던 낙원시장은 90년대 들어 의외의 복병 ‘노래방’을 만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래방이 성업을 이루면서 ‘라이브’ 문화의 불씨가 사그라든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쎄씨봉’의 부활,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 등 대중음악의 유행에 따라 반짝 특수를 누린 적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낙원상가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단골이나 아이들 교재용 악기를 구입하는 이들에 그쳤다.

 



악기 상인, 혹은 음악 장인을 만나다


이런 부침 속에서도 낙원상가 전체 상인의 85% 이상은 10년 이상 매장을 운영해오고 있다. 2대째 이어지는 매장도 20%가 넘는다. 악기 판매뿐만 아니라 악기 수리, 조율의 ‘고수’들도 모여 있다. 이들이 굳이 낙원상가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얼까? “악기와 관련해서는 여기서 모두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거나 악기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면 알려줄 사람이 수두룩해요. 다 만져보고 연주해보고 물어보면서 비교할 수 있는 거죠.” 색소폰 수리 1인자로 해외에서도 찾는 베델악기 김연성 대표가 말했다. 그는 색소폰을 전공한 뒤 수리사로 전향해 낙원상가에 자리를 잡은 지가 15년이 됐다.

 


투어 참가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드럼채널 조병화 대리




재미있는 기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타나라 김성웅 대표



만약 운이 좋게 플리마켓 같은 행사가 열리는 날 낙원상가를 찾으면 멋진 밴드 연주를 만날 수도 있다. 낙원상가에 몸담고 있는 음악 고수들이 모여 만든 ‘낙원밴드’다. 드럼채널의 조병화 대리는 낙원밴드에서 드럼을 맡았다. “낙원의 상인들에게 음악은 곧 삶이죠. 많은 이들이 악기를 통해 음악을 접하고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에요.” 그는 손님들 앞에서 종종 멋진 드럼 연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관과 현대미술 전시공간까지


20대~30대 젊은이들은 악기를 구입하거나 새로워진 낙원상가를 둘러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50대 이상 어르신에게 낙원상가는 영화를 보러 발걸음을 옮기던 곳이기도 하다. 낙원상가에 있던 허리우드 극장은 처음 상가가 문을 연 3년간 영화감독 신상옥이 운영했다. 2004년까지 개봉관으로 영업해오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문을 닫았다. 이후 예술영화관과 뮤지컬 전용관 등으로 운영됐다. 현재는 다시 허리우드라는 이름을 찾고 흘러간 옛 영화를 상영하는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획자 중심의 현대미술 전시장 d/p





작년 d/p에서 진행한 예술 이벤트  ‘사일런트 디제잉’        





허리우드 실버영화관




악기와 음악만 생각하며 낙원상가를 걷다 보면 뜻밖에 현대미술 전시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산낙원(Dispersed Paradise)’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이 d/p에서는 음악이나 낙원상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열린 가장 인상적인 행사는 2019년의 ‘사일런트 디제잉’이었다. 한창 영업 중이던 낙원상가를 가로지르며 파티를 즐긴 행사였다. DJ가 플레이하는 음악은 헤드셋을 낀 참가자들만 들을 수 있게 했다. 악기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음악을 즐기고 신나게 춤을 추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지하에서 만나는 반가운 재래시장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낙원상가에는 ‘지하 세계’도 있다. 어둑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뜻밖에도 ‘시장’을 만나게 된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종로 맛집이 숨어 있는 낙원시장이다. 청국장과 제육볶음 등을 푸짐하게 즐길 수 있어 한 TV 프로그램에서 착한 식당으로 선정됐던 일미식당도 이곳에 있다. 이곳 낙원시장에서는 1만 원짜리 한 장이면 누구나 배불리 속을 채울 수 있다. 그릇가게, 수입과자 전문점, 목욕타월에서 파리채 등 없는 게 없는 잡화점까지. 지금은 보기 힘든 물건들도 수두룩하다. 추억의 물건,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으로 가득한 낙원시장에는 어르신뿐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와 외국인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낙원삘딍을 아시나요?


처음 악기를 구입한 설렘의 장소로, 추억의 영화관으로, 혹은 허기진 배를 달래던 푸근한 시장이자 종로의 멋쟁이가 활보하는 동네로 기억되는 곳. 낙원상가에 대한 다양한 기억의 파편들은 낙원상가 1층의 ‘낙원삘딍’ 글자 앞에 서면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흔히 ‘상가’로 불리지만 본래 이 건물은 주상복합빌딩이다. 상가 위로 솟은 15층짜리 아파트에 현재도 149가구가 살고 있다. 1969년생이지만 지금도 쉽게 보기 힘든 규모의 고층아파트와 상가가 결합된 이 건물의 탄생기를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69년 완공 당시 만들어진 현판





난관과 조명 등 초기 모습을 간직한 1층 로비




낙원상가는 도로 위에 있다. 175개 콘크리트 기둥이 약 1만 평의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다. 건물 설계와 시공을 맡은 대일건설의 홍보팀 윤식 과장은 이런 건축 형태가 탄생한 이유를 들려줬다. 1960년대 말, 종로와 을지로를 잇는 삼일대로를 창덕궁 앞까지 확장하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상가 자리에 있던 시장 상인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시장 철거에 극렬히 반대하던 상인들로 고민하던 서울시와 건설사는 묘안을 냈다. 아예 도로 위에 상가를 짓기로 한 것이다. ‘이왕 짓는 거 규모를 넓히자’하여 5층짜리 상가와 15층짜리 아파트가 공존하는 빌딩으로 짓게 된 것이다.



 

 




도로 위에 떠 있다는 건축물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건설사는 안전에 특별히 신경 썼다. 한강에서 채취한 고품질 모래와 자갈로 탄탄하게 시공했다. 때만 되면 나도는 상가 재개발 소문을 잠재우는 것 역시 아직까지도 건재한 건물 덕이다. ‘못 하나 박기도 힘들다’는 불평이 있을 정도다. 51년이나 됐지만 매년 건물 안전진단에서 B등급 이상을 받고 있다. 낙원삘딩을 걷다 보면 지금은 만나기 힘든 자재를 사용한 기둥이나 바닥, 난간 등 곳곳에서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4층, 5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역시 국내 현존하는 마지막 기계식 엘리베이터다.

 



 

국내 현존하는 마지막 기계식 엘레베이터의 기계실





건설 노동자가 남겼을 천장의 낙서가 흥미롭다.






시민과 함께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하지만 역사적 공간이라 해도 추억만 먹고 살 순 없다. 잊혀가던 낙원상가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상인들이 직접 상가 활성화에 나서면서부터다. 상인들의 삶과 꿈 하나하나가 콘텐츠가 됐다. 유일뮤직 유강호 대표는 지난 10년간 상가번영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변화를 주도해왔다. “시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을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마음이었어요.” 상가번영회는 상인들의 재능을 활용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6년부터 진행된 ‘악기나눔’ 캠페인이다. 시민들이 사용하지 않는 악기를 서울시교육청이나 서울시에 기부하면, 낙원상가 장인들이 싹 수리해서 악기가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현재까지 1만여 점의 중고 악기가 낙원상가에서 새 악기로 변신해 문화소외계층 아이들에게 전달됐다. 이 밖에도 상인들이 직접 시민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나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나만의 우쿨렐레 만들기’, ‘낙원투어’, 플리마켓 등을 주최하고 있다.





나만의 우쿨렐레 만들기




기증품을 모아 만든 조형물, 악기나무




세미나, 워크숍, 북토크 등 소형 컨퍼런스를 위해 오픈한 청어람홀





비영리단체를 위한 공유공간 NPOpia



단순히 악기를 사고파는 매장을 넘어 음악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낙원상가는 몇 시간 만에 다 돌아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곳곳에서 만나는 상인들의 이야기까지 듣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잘 간직된 과거의 흔적은 현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도시재생’이라는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낙원상가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물이 아닌, 여전히 매력적인 우리 곁의 ‘낙원’인 이유다.

 


글_원영인(빈빈)   사진_이예린(일오스튜디오)

 




낙원상가 투어

낙원악기상가, 낙원시장, 옥상(이 투어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등을 돌아보며 음악과 상인,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투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당분간 진행이 중단되었다. 투어 재개 일시와 프로그램은 공식 SNS를 통해 공지될 예정이다.


낙원상가 공식 SNS 채널

블로그  http://blog.naver.com/enakwon

페이스북  www.facebook.com/nakwonmusic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nakwonmusic

 

낙원상가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28

영업 시간  평일, 토요일-9:30~19:30 / 일요일-일부 매장 오픈(연중 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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