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예술이 흐른다, 홍제유연

2021.01.14 2773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문명의 유적지


역사와 예술이 흐른다,  홍제유연
 


서울 서대문구의 역사가 깃든 유진상가.

이곳에 들어선 새로운 공공 예술공간 ‘홍제유연’으로 향했다.

산책 내내 긴 사색과 예술의 시간이 뒤따랐다.




좁은 길 한쪽에 박스들이 쌓여있다. 과일과 의류를 파는 상점도 군데군데 보인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마치 그린 듯한 시장 풍경으로 감성을 건드리는  곳. 서울시 서대문구의 터줏대감 격인 유진상가다.
지금은 상가라는 이름이 친숙하지만, 1970년대에는 주상복합 아파트 유진맨션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고급 아파트에 붙이던 맨션이라는 표현에서 예상할 수 있듯 유진맨션 초기 입주자 중에는 고위 공무원, 군 장성, 법조인의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진상가가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상가가 지어질 즈음은 남북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북한이 남쪽으로 침공할 때 홍은사거리는 서울을 지키는 최후 저지선이었다. 이곳이 뚫리면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시가지가 위험에 처한다. 유진상가는 고급 아파트이자 북한군 탱크를 저지하는 긴 직사각형 형태의 방벽으로 계획되었다.






 



방치된 유진상가 지하 공간이 예술공간 ‘홍제유연’으로 다시 태어났다.





벗겨진 페인트칠, 허름한 외벽. 유진상가에는 지난 시간이 배어 있다. 주거동은 낙후한 상태로 방치된 곳이 많다. 1990년대에는 내부순환로 건설로 건물 일부가 잘려 나가 지역의 흉물로 취급되기도 했다. 다만 상가 하층부에는 과일가게, 대형 슈퍼마켓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쇠퇴의 길로 접어든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않은 상인들 덕분에 상가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유일하게 모습도 활용도 변치 않은 곳은 설립 초기부터 방치돼있던 상가의 지하였다. 유진상가가 지어진지 50년째가 되는 2020년 7월, 이 공간은 도시재생을 위한 노력으로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숨어있던 250m 길이의 지하도는 역사와 예술이 흐르는 공간 ‘홍제유연(弘濟流緣)’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50년 만에 다시 이어진 홍제천


홍제유연은 2016년부터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미술사업 ‘서울은 미술관’의 일환이다. ‘서울은 미술관’은 매년 1개 대상지를 공모로 선정하고 그 장소에 의미가 있는 미술품을 만든다. 2019년 1월, 서대문구는 유진상가 하부 지하 통로 개방과 연계한 작품 설치를 요청했다. 50여 년 만에 발굴된 공간은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풍경이었다. 건물을 지지하는 콘크리트 기둥 110여 개 사이로 돌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수많은 거미줄이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독특한 풍경, 유진상가의 역사성, 현재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고려해 유진상가는 사업 대상지로 확정되었다. 공간 재생을 위해 서대문구와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협력에 나섰다. 







          <온기(팀코워크 作)>





홍제유연 프로젝트에는 예술기획자를 포함한 작가 6팀이 참여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관심과 직접적인 작품 활동 참여도 홍제유연이 가진 의미에 힘을 실었다. 무엇보다 공간의 원형은 최대한 보존하고 빛, 소리, 색, 기술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미술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침수 우려가 있는 환경적인 특성을 고려하다 보니 작품을 모두 완성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홍제유연은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문명의 유적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재생과 시민의 예술 향수라는 목적 아래 서울의 근현대사와 다가올 미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인연이 만나는 공간으로


홍제유연(弘濟流緣)은 ‘물과 사람의 인연(緣)이 흘러(流) 예술로 치유하고 화합한다’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시민들은 근현대사를 이야기꾼 삼아 아름다운 예술길을 걸으며 지친 마음을 치유받는다. 주말 낮에 방문한 홍제유연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강아지와 산책 나온 부부, 홍제천 주변을 운동 삼아 걷는 어르신, 주변을 서성이다 처음 보는 계단 아래서 홍제유연을 만난 가족도 보였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온 청년도 적지 않다. 홍제유연은 ‘인생샷’ 촬영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SunMoonMoonSun, Um…_윤형민 作>



 





<숨길_팀코워크 作>







SNS에 ‘홍제유연’을 검색하면 미술품을 배경으로 촬영한 게시물이 1천 개 넘게 올라와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온기_팀코워크 作>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 시대, 청나라에서 환향한 여성이 몸을 씻으며 마음을 치유하던 홍제천 물길의 의미를 빛과 색으로 표현한 라이트 아트 작품이다. <SunMoonMoonSun, Um…_윤형민 作>도 눈에 띈다. 땅속에 묻혀 있던 공간이 소리와 빛으로 채워진다는 의미로, 수면 위에 투영된 이미지로 한자 음절을 감상할 수 있는 설치미술 작품이다. <숨길_팀코워크 作>이 펼쳐진 길은 꼭 한번 걸어보길 권한다. 200m가 넘는 홍제유연 길 위에 숲 느낌이 나는 산책길을 조명으로 표현했는데, 천천히 걷다보면 걸음과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홍제 마니차>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






이 밖에도 시민들은 라이트 아트, 미디어 아트, 사운드 아트 등 8개의 설치미술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빛과 그림자를 콘크리트 기둥과 물길에 투사한 <흐르는 빛, 빛의 서사(뮌 作)>, 1천여 명 시민의 메시지를 담은 시민 프로젝트 <홍제 마니차>, 홍제초·홍은초 어린이들이 참여한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 등의 작품은 다양한 시선으로 발견한 주제를 통해 장소의 의미를 이어간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도시재생의 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예술을 가까이할 기회가 많지 않다. 친밀했던 것들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두고 낯선 일상을 살아가는 오늘날, 홍제유연은 서울 시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더욱이 공공미술은 실내가 아닌 열린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예술을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와 같은 공공미술 작품을 만나는 것이다.



      




홍제유연은 낡은 도시 공간이 새로운 용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오래된 상가 아래 뿌리처럼 뻗어나가 유유히 흐르는 역사의 흔적과 예술의 향기. 홍제유연은 이곳에 오래 산 주민에게는 추억의 산책로, 유진상가의 역사를 모르는 세대에게는 독특하고 예술적인 공간으로 기억된다. 고요한 공간을 걸으며 사색하는 동안 힘겨운 근현대를 겪어온 이들의 이야기가 평화로운 물길을 따라 잔잔히 흐른다.





홍제유연
위치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484 유진상가 지하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무료개방)



글_김수현(빈빈)
작품 사진 제공_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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