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을 잇는 28만 개 의자

2019.09.26 238

사람과 사람을 잇는 28만개 의자

   ©DJAKOB




그라츠(Graz)는 현대미술관 쿤스트하우스와 인공섬 무어인젤을 비롯해 미술과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 제 2의 도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라츠의 구도심에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하지만 예술과 아름다움이 공기에 배어있는 이 도시 또한 세계의 다른 도시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피할 순 없다. 오직 투자를 목적으로 한 도시계획이 낳은 신축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제대로 운행되지 않는 대중교통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해지고 있다. 여러 도시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도심공동화 현상이다. 그라츠의 구도심은 아름답고 역사적인 공간이지만 시민들은 편의를 찾아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그라츠 시 정부는 디자인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감각적인 도시재생 정책으로 도심을 재생하고자 했다.



시민이 직접 도시재생에 나서다

그라츠 시 야코미니 지역에 있는 두 개의 주요 도로를 시각적으로 이어줌으로써 공간에 매력을 더한제자리에, 준비, 출발!’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 널리 보도될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행정기관이 이끄는 탑다운방식의 도시재생은 시민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놓치기 쉽다. 이것이 바로 그라츠의 학생과 지역 아티스트, 전문가가 직접 야코미니 거리 재생에 나선 이유다.



©Team Jakomini

주민들은 아티스트 등이 진행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도시재생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도심 가까이에 있는 매우 좁은 도로인 야코미니는 지나는 데 3분 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다. 전통적으로 작업실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여러 상점이 자리잡고 있지만 공공공간이 부족해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거리를 사람들이 만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공공간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FH 요하네움 대학 학생들과 건축사무소 OSA, 아티스트 공동체 츠바인토프, 극단 인터ACT가 손을 잡고 이곳에서 3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먼저 OSA와 협력한 팀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민들이 바퀴가 달린 편안한 의자에 앉은 상태로 거리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의자를 타고 야코미니 거리를 지나는 시간에 착안해 ‘3분 서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리를 지나는 3분 동안 지역 상인들은 의자에 앉은 시민에게 차를 내주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마사지를 해주면서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아티스트 공동체 츠바인토프는 헬싱키의 한 지역 라디오 방송국과 함께 야코미니의 소리를 녹음하고 편집해 야코미니 지역에 방송하는 야코미니의 소리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인터ACT와 함께한 팀은 야코미니 거리와 주변 지역에서 시민들과 토론회를 열고 이를 퍼포먼스로 재구성해 거리 곳곳에서 선보였다.


그동안 시 주도의 도시재생 정책에 회의적이었던 주민들도 실제로 야코미니에서 활동하며 의견을 경청하는 예술가와 학생에게 마음을 열었다. 단발성 행사들이었지만 이런 실험을 통해 시민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시민들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DJAKOB

 건축가와 목수들이 합심해 ‘28만 개의 의자프로젝트를 위한 벤치를 만들었다.



28만 개 의자로 공공공간을 만들다

이런 프로젝트의 진행 결과는 야코미니 지역에는 무엇보다 공공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로 수렴됐다. 지역 목수와 예술가들로 구성된 콜렉티브 브라우흐스트(독일어로필요’)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코미니 지역의 특정 장소에서 쓸 수 있는 다양한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라츠 시민이 쉴 수 있는 공공장소를 조성하기 위해 건물 앞에 놓을 작은 벤치와 가로등에 붙일 수 있는 테이블 등을 생산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거리에 설치한 가구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집 앞과 골목에 놓기 좋게 만든 가구들이 구도심 근방에 설치되었다는 소식이 시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면서 며칠 만에 모든 가구들이 사라졌고, 마법처럼 전혀 다른 동네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웃지 못할 이야기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야코미니 뿐만 아니라 그라츠 전체가 공공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에 착안해 탄생한 것이 바로 ‘28만 개의 의자프로젝트다. 그라츠의 시민은 총 28만 명. 이들 모두에게 하나씩 각자의 의자(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다만 반드시 공공공간에 의자를 설치해야한다는 의무 조항을 달았다. 집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이웃 주민과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문화였고, 현재도 시외 지역에서는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의자 하나를 놓음으로써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치던 공간들은 시민들이 실제로 머무르고, 시간을 보내며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 된다.




©DJAKOB

벤치는 그라츠 곳곳에 놓여 시민들의 교류를 만들기 좋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즉시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큰 반향을 낳았다. 무료로 의자를 나눠준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의자를 받고 후원서에 서명하려는 인파가 줄을 섰다. 다만 한 행사에 150개 정도의 의자밖에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28만개의 의자를 생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남은 과제다.

 

서울의 공공공간은 안녕하십니까?

한번에 완수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지만 주민이 원하는 것, 주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전혀 의외의 경로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공공공간의 부족은 오래된 도시가 현대로 오며 겪을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문제다. 규모는 수십 배 차이가 나지만 서울 역시 마찬가지다. 너른 광장이나 공원은 있지만 도심 곳곳에 앉아서 머무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그만 공공공간들은 부족하다. 카페 같은 상업 공간이 아닌, 도시의 삶에서 부담 없이 앉았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이 늘어난다면 어느 날 거기서 문득 다른 시민과 말을 트게 될 지도 모른다. 바로 그 한 마디가 도시를 재생해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_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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